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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키아 _ <외전> 이리스와 키라 디마인

일곱마리여우 2014. 8. 16. 21:05





<외전> 이리스와 키라 디마인

 

 

1. 이리스

 

이리스는 그의 뾰족한 귀를 살짝 머리띠로 감추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하지만 한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사람의 외모까지 신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횃불을 켜면 좋았지만 공기가 워낙 탁했기 때문에 그나마 남은 산소마저 사라질까 봐 차마 켜지 못했고, 대신 눈이 좋은 이리스가 앞장을 서서 가기로 했다. 다행스럽게도 동굴이 워낙 컸기 때문에 어디에 부딪히거나 할 위험은 없었다. 너무나 큰 동굴의 크기에 처음에는 드래곤이 사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드래곤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드래곤이 사는 동굴은 들어가기도 힘들었다. 동굴 앞쪽에 ‘마법의 트랩’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이 없다고 해도 던전의 탐험은 언제나 위험이 뒤따랐다. 더구나 동굴 바닥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탐험가들의 뼈들이 널려 있었다. 드래곤은 아니라도 어떤 몬스터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잠깐!

 

이리스는 손을 들어 사람들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리스의 앞쪽에는 정교한 조각상이 있었는데 어지나 정교한지 살아있는 사람이 당장 돌을 깨고 나올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오? 우리는 한시 바삐 교황께 이곳에 있을 고대의 무기를 가져와야 합니다. 조각상이나 보고 있을 시간이 없소.

 

나이 어려 보이는 한낱 궁수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 불만이었던 한 늙은 신관이 결국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그 신관이 워낙 고위 신분이었기 때문에 뒤따르던 다른 신관들이나 병사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이 탐험대의 리더는 이리스였다. 상황판단력도, 그리고 실력도 이리스만한 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신관은 그걸 인정하기 싫었다.

 

“이런 외딴 동굴에 이렇게 정교한 조각상이 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뭐가 이상한 거요? 어떤 미친 녀석이 여기서 혼자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자기가 짝사랑하는 여자를 조각한 것처럼 보이는데? 바보로군. 그저 예쁜 척만 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여자들을 위해 그런 짓을 하는 남자들은 다 바보들 뿐이지.

 

비웃음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여자인 이리스를 깔보는 듯한 눈빛이 다분했다. 늙은 신관은 어둠 속이라 이리스가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표정을 지었지만 이리스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 성격도 그러했지만, 자신의 추측이 틀릴 수도 있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리스는 우선은 이 동굴을 벗어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 조각상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 석화 되어 굳어진 것 같습니다. 저 깊은 동굴 속에는 비홀더나 바실리스크, 혹은 코카트리스 같은 생물들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전 나머지 탐사인원들이 합류할 때까지 탐사를 잠시 중지했으면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비홀더나 바실리스크, 그리고 코카트리스 등은 사람을 돌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나 비홀더의 경우에는 눈빛만 봐도 그대로 돌이 된다고 하는 무서운 몬스터였다. 만약 그것들이 이 동굴에 있다면 그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달아나야 했다. 하지만 늙은 신관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기색이었다.

 

“그깟 몬스터들이 뭐가 무섭단 말이오? 그런 몬스터들을 처치하기 위해 당신이나 나 같은 능력자들이 같이 온 것이 아니겠소? 설마 그런 몬스터들이 무서운 거요? 당신에게 이스의 활을 내리신 교황님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

 

이번에는 이리스도 조금 화가 났다. 눈살을 찌푸렸고 뭐라고 대꾸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평정을 찾았다. 어차피 어두워서 다른 사람들은 그의 표정의 변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의 안위 때문입니다. 비홀더나 바실리스크의 경우에는 웬만한 공격에는 상처도 입지 않습니다. 특히나 비홀더의 경우에는 마법에도 강력하죠. 만약 비홀더가 나타난다면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을지도 모릅니다.

“당신만 빼고? 건방진! 난 전설의 엘프 마을에도 다녀온 사람이야! 그깟 비홀더 쯤이야 신의 힘이 담긴 내 손가락 하나면 끝장이라구! 당신은 무서우면 뒤에서 기다리시오. 내가 병사들을 이끌고 다녀올 테니까. 무서우니까 별 변명을 다 하는군!

 

늙은 신관은 휘적휘적 걸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이리스는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이리스를 제외하고는 늙은 신관이 두 번째 지휘자이기에, 그리고 비록 이리스가 탐사대 대장이지만, 탐사가 끝난 뒤에는 그 늙은 신관이 이리스보다 더 높은 신분이기에 사람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신관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이리스 역시 한숨을 쉬며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서간 이들에게는 불행하게도 이리스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조각상들은 많아졌고, 사람이 아닌 동물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막다른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무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위에 온통 돌로 된 조각상이 가득했고, 그 가운데에는 드래곤 만큼 거대한 비홀더가 그 큰 눈알들을 번뜩이며 떠 있었던 것이다. 앞장서서 걷던 늙은 신관은 손도 쓰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졌고, 옆에 있던 다른 신관들 역시 제대로 신력을 써보기도 전에 차례로 굳어졌다. 궁수나 병사들은 열심히 화살을 쏘고 검을 휘둘렀지만, 시간의 차이만 날 뿐 모두 돌이 되고 말았다. 뒤늦게 뛰어간 이리스는 한숨을 쉬며 멀찍이서 그런 비홀더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예상대로 이미 탐사대는 이리스를 제외하고는 전멸이었다. 더구나 너무나 큰 녀석이어서 이리스로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냥 되돌아올 수도 있었지만, 이리스에게는 놈을 죽여야 할 이유가 이미 생긴 상황이었다. 그 늙은 신관을 돌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이리스는 비홀더의 눈을 세어보고는 이스의 활에 화살을 재었다. 한꺼번에 대여섯 발의 화살이 비홀더에게 날아갔고, 그것은 가장 큰 눈을 중심으로 각각의 눈에 정확히 박혔다. 갑작스런 공격에 비홀더는 놀라 기괴한 소리를 내며 그 거대한 몸집을 움직여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움직였지만 두 번째 화살들이 또 한번 비홀더의 눈들을 맞추었다. 그리고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계속적으로 화살들이 날아와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홀더의 각각의 눈에 박혔다. 놀라운 솜씨였다. 결국 몇 차례의 화살공격으로 인해 비홀더는 장님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리스는 재빨리 비홀더에게 다가섰다. 석화가 되지 않기 위해 비홀더의 남은 눈들을 보지 않으면서 돌이 된 궁수의 화살통을 낚아채고는 다시 화살을 날렸다. 자신의 화살은 이미 떨어진 상태였다. 지겹도록 많은 비홀더의 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차례차례 화살에 맞으면서 비홀더의 그 많던 눈도 결국 모두 화살이 박히게 되었다.

 

이제 당황한 것은 비홀더였다. 생겨난 이래 한 번도 장님이 된 적이 없는 비홀더로서는 눈 이외의 감각기관으로 움직인 적이 없었기에 금세 이리저리 벽에 부딪혔다. 워낙 커다란 동굴이었지만 비홀더 역시 굉장히 컸기에 여기저기 난 석순과 종유석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이리스의 활은 비홀더의 몸에 박혔고, 비홀더는 어떻게든 이 무서운 궁수로부터 달아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 이리저리 부딪히던 비홀더는 동굴 밖으로 뛰쳐나왔고, 바깥의 나무나 바위에 계속 부딪히다가 결국 근처에 있던 추적대에 의해 죽고 말았다.

 

이리스는 더 이상 비홀더를 쫓지 않고 있었다. 그저 방금 전까지 자신을 따르던 돌이 된 탐사대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스는 고집을 부리던 늙은 신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벨트에는 이리스의 활에 박힌 보석과 똑 같이 생긴 둥근 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엘프들만이 가지고 다닌다는 ‘엘프의 보석’이었다.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셨나요. 이번 탐사가 끝나면 말하려고 했는데요...... 이젠 내가 당신의 딸이라는 것은 영원히 비밀이 되겠군요……. 그래도 하나는 묻고 싶었어요. 당신이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 엘프들에 구출되었을 때 당신을 그렇게 열심히 간호했던 내 어머니에 대해 기억이나 하고 있었는지 말이죠. 아버지......

 

 

 

2. 키라 디마인

 

때는 5차 항마대전이 한참 진행 중인 때였고 절망적인 상황이었지. 우리는 본대와 떨어져서 벌판을 헤매고 있었어. 사방은 온통 몬스터들과 우리 병사들의 시체뿐이었고 말이야. 30명도 되지 않은 우리 낙오자들은 서둘러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열심히 달렸어. 하지만 갈수록 늘어나는 몬스터들은 끝도 없이 우리들을 공격했지.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포위가 되고 말았어. 몬스터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우리들의 수는 줄어만 갔지. 모두들 절망에 빠져버렸다고나 할까?

 

그때였어. 내 왼편에 있던 작달막한 소녀 하나가 자기 키만한 검을 빼 들더니 달리기 시작하더군. 말리고 싶었어. 그 소녀가 달리는 곳은 몬스터들이 가장 밀집한 곳이었거든! 더구나 맨 앞쪽에 있는 녀석은 그 소녀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오크였지. 소녀가 들고 가는 검은 끝이 부러진 묘하게 생긴 양날검이었어. 그나마도 너무 커서 그런지 땅에 질질 끌더군. 사람들은 안타까워했지만 괜히 그 쪽으로 도와주러 갔다가는 수비망이 뚫려서 포위하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모조리 죽을 수도 있었기에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어.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때부터였지. 소녀를 가로막고 있던 오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허리 아래 위로 따로따로 무너지기 시작했어. 그 커다란 오크를 순식간에 반으로 베고 지나간 거야. 대낮인데도 백색의 검광이 주위를 메웠고, 번뜩이는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몬스터 하나가 죽어나가곤 했지. 정말 장관이었어. 녹색과 붉은 색의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몬스터들은 이젠 감히 그 소녀에게 덤벼들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서더군. 순식간에 포위망은 뚫렸고, 우리들은 이제 그곳을 통해 빠져나가기 시작했어. 그러는 동안에도 소녀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지. 만약 그 앞에 골렘이나 드래곤이 있었다고 해도 다 뚫고 지나갈 기세였어. 아니, 그때의 그 기세라면 아마 골렘이나 드래곤도 막지 못했을 거야.

 

결국 소녀의 덕분으로 우리는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어. 정말 기적 같았지. 그렇게 위험한 순간이 지나가고 잠시 쉬는 동안 우리는 그 소녀 주위로 모여들었어.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대체 누구이길래 그렇게 잘 싸우나 해서였지. 그런데 내 친구 중 한 명이 외치더군. 저 소녀가 가진 검이 그 유명한 ‘천국의 길로틴’이라고 키라 디마인이라는 영웅이 홀로 던전에서 가지고 나온 검이라고. 우리는 깜짝 놀랐어. 알고 보니 바로 눈 앞의 소녀가 그 키라 디마인이었던 거야.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듯한 앳된 얼굴인데도 그런 대단한 실력을 가졌다는 사실에 우린 정말 부러웠지. 게다가 천국의 길로틴이라는 그 검은 우리 같은 장정이 들기에도 버거울 만큼 굉장히 무거웠어. 그렇게 거대하고 무거운 검을 저런 여린 소녀가 들고 싸웠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지.

 

우리는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헤매야 했어. 알고 보니, 우리가 서쪽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간 곳은 정 반대 동쪽이었지. 덕분에 우리는 그 황량한 벌판을 무려 3일 간이나 돌아다녀야 했던 거야. 그래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어. 키라 디마인이 있었기 때문이지. 게다가 굉장히 활발한 소녀였기 때문에 우리는 가는 동안 내내 유쾌하게 웃으며 갈 수 있었어. 어른들이 즐기는 진한 농담도 할 줄 알더군. 한 번은 소변을 보는 내 엉덩이를 철썩 때려서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누던 오줌이 찔끔 들어가더군. 물론 주위에 사람들은 웃느라 난리가 났고 말이야. 그래도 싫지 않았어. 그 소녀는 우리들의 구세주였고, 우리들은 분명 이 위기에서 살아날 거라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결국 우리는 본대와 합류할 수 있었어. 그리고 키라 디마인은 우리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3단계나 더 높이 진급을 할 수 있었지. 이제 어엿한 한 부대의 대장이 된 거야. 우리들은 앞을 다투어 그 부대에 지원했지. 적어도 그의 부대에 들어가면 몬스터들로부터 훨씬 안전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어. 실제로 그는 항상 맨 앞에서 싸웠지. 부하들을 먼저 내보내지 않았어. 덕분에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말이야. 나중에는 오히려 우리들이 말릴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너희들도 그가 싸우는 모습을 한 번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내 평생에 그렇게 호쾌하고 속 시원하게 싸우는 사람은 처음 봤지.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면서 거대한 백색의 검이 하늘을 가를 때마다 정육점 고기처럼 툭툭 떨어져나가는 몬스터들의 팔다리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사기가 오르곤 했으니까. 후에 소녀티를 벗고 어엿한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키는 그리 자라지 않았어. 어렸을 적에 가난한 고아로 자란 덕분에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리 크지 못한 것 같아. 그렇게 어렵게 자랐으면서도 항상 명랑하게 다니는 모습을 보면 정말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부하들을 그렇게 엄마처럼 챙겨줄 수가 없었어. 그때 6차 항마전쟁에서도 부하들을 구하려고 앞장서다가 그만...... 그 망할 놈의 몬스터 녀석은 내가 처치했지. 갈갈이 찢고 또 찢었어. 제길! 그때 키라에게 독을 막아주는 변변한 갑옷만 있었어도 살았을 텐데......

 

후후, 아직도 내 엉덩이를 때리며 웃던 그의 웃음소리가 기억 나는군. 내 첫사랑이었던 그가 말이야……